"내가 가야 의심받지 않는다" 폭탄 갖고 뛰어든 임신부

조회수 2017. 8. 14. 13:3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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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폭파범으로 불린 독립투사 ‘안경신’
1920년 8월 3일 평남도청에 폭탄 투척
독립의지 세계에 알려
비밀결사 대한애국부인회 연락조직원으로 활동

중세시대에는 유죄와 무죄를 무장 대결의 결과에 따라 결정하는 결투재판제도가 있었다. 그런데 결투재판을 할 수 없는 어린이·여성·노령층의 경우 투사(鬪士)가 대신 싸우기도 했는데, 우리 역사에서 일제가 남긴 상흔(傷痕)만큼이나 탄압의 사슬을 끊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독립투사들이 많았다.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자발적으로 나섰던 독립운동가들 가운데는 임신 7개월의 몸으로 폭탄을 투척했던 여성, 안경신(安敬信·1888~?)도 있었다.

1920년 ‘독립전쟁의 해’ 선포한 임시정부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이 한국·중국·일본 등 동북아 3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했던 임시정부는 100여 명의 미 의원단에 항일투쟁 의지를 적극적으로 피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국제 여론을 환기(喚起)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대원 13명을 선발해 3개 결사대로 나누어 국내에 밀파했다. 그들 중에는 장덕진·박태열·문일민·우덕선을 비롯해 안경신이 소속된 결사대 제2대도 있었다. 폭탄과 권총으로 무장한 대원들은 평남도청과 평양경찰서, 평양부청에 폭탄을 투척하려는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

먼저 8월 3일 밤 9시30분쯤 문일민과 우덕선이 평남도청에 폭탄을 투척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일제는 평양의 경계태세를 한층 강화했다. 밀파된 대원들이 삼엄해진 경계를 뚫기 위해 고심하던 중, 당시 임신부였던 안경신은 자신이야말로 의심을 받지 않는다고 동지들을 설득한 뒤 과감히 적진에 들어갔다. 움직이기도 힘든 임신부의 몸으로 평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는 임무까지는 완벽하게 수행했다. 그러나 빗물에 젖은 폭탄은 불발로 그쳤다. 

이날 이후 8월 15일과 24일, 9월 1일 선천역·선천경찰서를 잇따라 폭파하는 등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다. 이와 동시에 평양거리는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전 광복군사령부)의 인장이 날인된 경고문과 격문(檄文·어떤 일을 여러 사람에게 알려 부추기는 글)이 뿌려졌다. 이에 일제 경찰은 폭파범을 잡기 위해 혈안이 돼 평양 시내를 샅샅이 뒤졌다

‘사형선고를 받은 여자 안경신’ 동아일보 1921년 6월 21일 자 사진.

갓난아이 안고 법원에 들어선 안경신

평남경찰부 폭탄 거사에 함께했던 대원들은 임무를 마친 뒤 무사히 서간도로 귀환했다. 하지만 임신 7개월로 몸이 무거웠던 안경신은 대원들의 안전과 몸에 무리가 될 것을 염려해 조국에 머물렀다. 대원들이 귀환한 뒤에도 안경신의 조국 독립에 대한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대원에게서 폭탄 한 개를 건네받은 그녀는 다시 거사를 도모하려고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서 잠시 몸을 피해 일제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러던 중 함경남도 이원군 최용주 집에서 일제 경찰에 발각돼 안경신은 1921년 3월 20일에 체포됐다. 함경도에서 원산을 거쳐 평양으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안경신은 아이를 출산했다. 그리고 태어난 지 12일 된 아기를 품에 안고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으로 호송됐다. 

폭파범으로 주목받던 안경신의 행적은 조사 과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1919년 평양 서소문 일대의 3·1만세운동에 참여하다 경찰에 체포돼 29일간 구금된 사실이 밝혀졌다.

평남도청 폭파 사건 주역으로 징역 10년

평안남도에서 출생한 안경신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평양 3·1만세운동부터 애국 투쟁 대열에 들어섰다. 그는 백범 김구의 동지이자 평양교회 목사였던 도인권(임시정부 군사국장 활동)과 1919년 평양 3·1만세운동을 총지휘했던 이승훈(3·1운동 민족대표 33인), 대한애국부인회를 함께 했던 안정석(송죽결사대 조직)과 함께 무장항쟁에 깊이 관여했다. 그리고 3·1운동, 대한애국부인회 사건에 이어 평남도청 폭파 사건의 주역이 된 그의 이름은 1920년 11월 4일 조선소요사건의 ‘대한애국부인회 검거서류’에서도 확인된다.

안경신은 비밀결사 대한애국부인회 지회의 교통부원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 교통부 산하 지방 연락조직원으로 국내외 정보를 수집하고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 

이런 안경신의 적극적인 행적이 확인될수록 그에 대한 조사가 길어졌고, 재판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이윽고 1921년 5월 10일 위증 혐의로 징역 1년 구형에 이어 6월 4일 형사부 법정 제2호실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결국 사형을 구형받았다. 하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고 항소(抗訴)한 안경신은 1922년 4월 8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평남도청 폭탄범 안경신 아이를 품에 안고 감옥에’라는 제목의 1921년 5월 2일 자 동아일보 기사.

전해주지 못한 훈장

징역 10년의 세월 동안 안경신은 태어난 지 12일 된 아기와 헤어졌다. 출옥 후 3년 뒤에는 친정어머니가 충격으로 돌아가시는 등 슬픈 일을 겪었다. 이윽고 형을 몇 달 남긴 채 출옥해 8살이 됐을 아이를 찾아 나섰다. 어렵게 찾은 아이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이 돼 있었다. 참담하리만치 힘겨웠을 안경신의 생애는 그 시대 나라를 잃고 설움에 북받쳐 살았던 우리 민족의 모습과도 같지 않았을까.

평남도청 폭파범으로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주목받았던 안경신에 대한 이후의 기록은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 폭파범으로 잡혔을 당시 그녀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과 수감 기록, 신문 보도자료 몇 점이 전부다. 독립투사 안경신의 목숨을 건 독립투쟁의 공적을 인정해 1962년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지만, 아직도 후손들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전해주지 못한 훈장! 그 시대 정의를 실천했던 여성 독립운동가 안경신을 떠올려 본다.

<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부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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